아직도 기억난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시던
CM(건설사업관리)의 장밋빛 미래
너희는 단순한 노가다가 아니라, 기획부터 설계, 시공, 운영까지 전 과정을 컨트롤하는 지휘자가 될 거다!
그 말을 믿고 토목공학도의 꿈을 키웠나??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와 선배의 얘기를 많이 듣는 나로서 조금은 비관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줄까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나라 토목 판에서 '진정한 CM'은 거의 없다.
오직 이름만 바꾼 '감리'가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교수님의 장담과는 달리 토목은 여전히 감리에 매몰되어 있을까?
1. 법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크다
교수님은 CM이 사업의 효율을 높이는 '선진 기법'이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나라는 「건설기술 진흥법」이라는 법적 굴레가 지배하는 구조다.
법에서 "이 규모 공사는 무조건 사람 뽑아서 감시해!"라고 강제하고 있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사업의 효율? 공기 단축?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일단 법에 정해진 인원수 채워서 '감리' 세워두는 게 최우선이다.
'관리(Management)'가 아니라 '의무(Obligation)'로 접근하니, 혁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
2.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팩트 하나. 원래 우리나라는 '책임감리'라는 용어를 썼다.
그런데 2014년에 법을 개정하면서 이걸 '건설사업관리(CM)'라고 이름을 통합해 버렸다.
행복회로 "드디어 우리나라도 선진국형 CM이 도입되는구나!"
현실 껍데기(명칭)만 CM으로 바꾸고, 속알맹이(업무 내용)는 여전히 시공 단계에서
시시비비만 가리는 '감리' 그대로
이걸 업계에서는 '무늬만 CM'이라고 부른다.
여러분이 취업 공고에서 보는 'CM'의 90%는 사실 그냥 공사장에서 도면대로 지어지나 감시하는 '감리'라고 보면된다.
3. "왜 공기를 못 줄여?" - 효율보다는 '절차'가 목숨인 이유
교수님은 CM의 핵심이 Value Engineering(VE)을 통해 돈을 아끼고 공기를 줄이는 거라고 가르칠거다.
하지만 공공 토목 현장에서 함부로 공기를 줄였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느 유능한 CM 단장이 혁신적인 공법을 제안해서 공기를 3개월 단축했다고 치자
민간에서는 보너스를 받겠지만, 공공 공사에서는
"왜 처음부터 설계를 제대로 안 했어? 예산 과다 책정 아니야?"
감사의 타깃이 된다.
결국 CM(감리)들은 '더 잘하는 법'보다 '법에 적힌 절차대로만 해서 욕 안 먹는 법'을 먼저 배운다.
창의성을 발휘하는 순간, 책임져야 할 서류만 수천 장
4. '전문가' 위에 '갑'이 있는 구조
진정한 CM이라면 발주처(Client)를 대신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로, 철도 현장의 발주처인 공공기관들은 이미 그 자체가 거대한 전문가 집단이다.
발주처는 "우리가 30년 동안 길 닦아왔는데, 용역 업체인 너희가 우리를 가르쳐?"
현실에서는 CM은 발주처의 결정을 도와주는 파트너가 아니라,
발주처가 내린 결정을 현장에서 시공사에게 전달하고 닦달하는 '전달자'
혹은 사고 났을 때 대신 욕먹는 '총받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5. 결정타 "사고 나면 CM(감리)이 다 책임져
최근 무량판 구조 사태나 대형 붕괴 사고들을 보면
사고가 터지면 가장 먼저 압수수색을 당하고 법정에 서는 걸 보면
바로 '건설사업관리자(감리)'다.
공공기관 입장에서는 CM에게 권한은 주기 싫지만, '책임'을 떠넘기기에는 감리 제도가 최고고
"우리는 전문가인 감리 단체에게 맡겼고, 그들이 승인한 거다"라고
말하면 되거든
이러니 현장에서 '혁신적인 관리'가 나오겠나?
오로지 '법적 근거 남기기'와 '서류 보존'에만 목숨을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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